오늘의 주요뉴스
정동 칼럼
[정동칼럼]아버지와 딸
정태인 |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새벽 담배를 빼어 무는 내 야만성을 날카롭게 질책하던 바람 끝이 한결 무뎌져, 이젠 “부드럽다”는 느낌마저 드는 계절인데 국민들은 난데없는 칼바람을 맞았다. 칼칼한 목소리와 매서운 눈초리는 영락없이 ‘아버지 박통’이다. 하지만 난 “아”하면서 무릎을 쳤다.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 진정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새 내 안으로 스며든다. 내 경우엔 고 박현채 선생이 그랬다. 호방한 그에 비해 난 ‘쪼잔하기’ 이를 데 없고 그의 ‘민중’ 사랑은 흉내조차 낼 길이 없지만 어느 새 “민중이 원한다면 모든 걸 쓴다”는 그를 어설프게 따른 것인가, 온갖 주제에 변죽을 울리는 것도 그렇고 여전히 술 속에 사는 것도 그렇다.

딸 박통의 “그”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아버지 박통이다. 나야 모방과 학습이라는 문화적 선택을 한 데 불과하지만 딸은 아비의 생물학적 유전자까지 물려 받았으니,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다수준 선택’의 훌륭한 표본이라 할 만하다. 이를테면 아버지 박통이 쿠데타 이후 깡패를 잡아들였다면 그 딸은 4대 사회악을 척결할 것을 다짐한다. 성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 가정파괴범들은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마을 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없앤” 새마을운동이다. 딸은 요즘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협동조합, 마을기업 만들기를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지목했다. 1970년대 말 새마음운동을 벌일 정도로 새마을운동을 흠모한 딸이니 그럴만도 하다.

문제는 세 번째, ‘경부고속도로’가 무엇이냐였는데 딸 박통의 담화는 바로 ‘미래창조과학부’의 ‘융합’이 답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최순홍 청와대 미래전략수석비서관은 “방송통신과 과학기술의 융합이 ICT분야의 경부고속도로”라고 정리했고 딸 박통은 ‘통섭’이라는 어려운 낱말을 주머니 속의 칼처럼 빼든다.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의 땅을 잇고 융합은 산업과 시장을 이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다. 이런 웅장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송장악”이라는 터무니없는 구실로 발목을 잡으니 분노할 만하다. 아비는 국회가 발목을 잡으면 여당 대표에게 재떨이를 던지고 중앙정보부의 일개 직원이 중진 의원의 수염까지 뽑았지만 이젠 육군참모총장 출신 국정원장도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따지고 보면 기껏 유선방송 몇 개를 ‘미래부’로 이관하는 문제를 놓고 대통령이 담화까지 발표하는 게 이제는 이해가 갈 것이다.

존경하는 아버지를 따라 하는 건 결코 잘못이 아니고 실제로 인수위 보고서에 제시된 국정목표는 훌륭하다. 성장률 대신 고용률을 중시한다든가 물리적 자본 대신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는 주장,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 ‘쾌적하고 지속가능한 환경’, ‘신뢰받는 정부, 정부 3.0’이 그러하다. 통섭이나 융합에서 보이듯이 최근의 진화론적 학문 조류마저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내용은 10년 전이나 별 다를 바가 없다. 목표는 진화했는데 수단은 여일하다. 더구나 대통령은 거의 자동으로 30~40년 전을 떠올릴 텐데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예컨대 아버지의 새마을운동은 초가집과 함께 사회적 경제도 말살했다. 해방 후 흔전만전하던 각종 조합이나 두레와 계 등 자생적 마을 조직은 모두 새마을운동에 편입돼 가뭇없이 사라졌는데 그것들이 바로 사회적 경제요, 사회적 자본이다. 서울시 등 각 지자체에서 현명하게 돕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위에서부터 돈벼락이나 행정지침을 맞는다면 소중한 희망의 싹을 딸이 또 한번 말살하는 비극이 되풀이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신뢰와 협동의 네트워크지 새마을 경진대회가 아니다.

‘사회적 자본’이나 ‘융합’은 모두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진화’하는 것이지 위에서부터 군대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다양한 관련 기술과 산업의 클러스터지 그런 중앙 부처가 아니다. 정부의 개입은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세심해야 한다. 일방통행의 정부 1.0, 쌍방향의 정부 2.0을 넘어 개방·공유·협력의 정부 3.0을 만들겠다는 것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목표다. 하지만 지금까지 딸이 보여준 행태는 아비의 정부 1.0에도 못 미치는 게 아닐까? 현재 정부의 어느 인사가 진화론이나 네크워크이론을 이해하고 있을까? 목표뿐 아니라 수단도 그에 걸맞게 진화해야 한다.

댓글

공유해요

이 기사 어땠나요?

오늘의 핫클릭!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 Document

인기RT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