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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과학과 종교는 애초에 싸울 이유가 없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다윈의 경건한 생각…코너 커닝햄 지음·배성민 옮김 | 새물결플러스 | 830쪽 | 3만6000원

리처드 도킨스가 2006년 <만들어진 신>을 출간하면서 일이 시끄러워졌다. 기세등등한 무신론자들은 먼지 쌓인 전통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던 종교, 특히 기독교를 공격했다. 도킨스와 함께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선봉에 섰다. 이 강경한 두 명의 무신론 전사들을 묶어 ‘히치킨스’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여기는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을 공격했고, 미국은 ‘십자군’ 운운하며 이슬람에 반격했다. 종교가 이 세상에 화마를 다시 불러온 것이다. ‘히치킨스’가 작심하고 종교 비판에 나선 까닭이다.

종교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반박에 나섰다. 수녀로 살다가 환속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신은 어디 있나”라는 물음에 “신은 인간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암스트롱은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는 대신, 종교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종교는 교리, 믿음이 아니라 수행이라면서, 종교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보듬는 가장 중요한 기제라고 설명한다. 암스트롱이 부드러웠다면, 영국의 신학자 코너 커닝햄은 거칠다. 무신론자들의 ‘헛소리’를 일일이 소개하고 논박한다. 암스트롱이 대중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조곤조곤 말했다면, 커닝햄은 중세의 교부부터 프리드리히 니체, G K 체스터튼, 모리스 메를로 퐁티, 자크 라캉, 알랭 바디우 등을 현란하게 인용한다. 주와 색인만 150여쪽에 이른다. 역시 현란하기 이를 데 없는 슬라보예 지젝은 커닝햄의 <다윈의 경건한 생각>(원제 Darwin’s Pious Idea)이 “혼란스러운 우리 시대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평했다.

커닝햄은 다윈을 다윈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를 기독교도들로부터 구해낸다. 다윈주의와 기독교 교리는 애초에 싸울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윈 근본주의자와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엉뚱한 곳에 자신들의 신앙탑을 세운 뒤, 그곳에 숨어 상대방에게 화살을 쏘고 있다. 어쩌면 이 두 집단은 ‘적대적 공생관계’일지도 모른다.

커닝햄은 다윈 근본주의자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극도의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집요하게 지적한다. 다윈 근본주의는 신의 근거를 파괴하다 못해 인간이 선 땅의 토대까지 허문다.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을 믿는다면 다윈주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생물학을 넘어 사회학, 심리학, 윤리의식에까지 다윈주의를 적용할 수 있다. 조지 게이로드 심슨은 심지어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 이전에 나온 해답은 모두 가치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인간과 유인원이 존재론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다면, 유인원과 개, 개와 물고기, 물고기와 물풀, 물풀과 플랑크톤의 관계도 그러하다. 인간의 지위는 미끄럼틀 위에 오른 듯 미끄러진다. 다윈 근본주의는 무엇이든 녹일 수 있는 ‘만능 산’이다. 산화력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그것을 담으려는 어떤 용기든 녹이고, 결국 지구에 구멍을 뚫어버린다.

기독교 안에도 여러 가지 종파가 있듯이 다윈주의 안에도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다. 그중 ‘적응주의’는 유기체가 표현한 세밀한 부분이 모두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공작의 화려한 꽁지깃, 사슴의 거대한 뿔 모두 자연에 적응한 결과라는 것이다. 기독교에도 이와 비슷한 관점이 있는데 이를 ‘효용 창조론’이라고 부른다. 이 관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라고 본다. 창조론자가 “하나님이 하셨다”고 외칠 때, 적응주의자는 “자연선택이 했다”고 받아친다.

이것은 사실 같은 논리로 다른 단어를 배열한 것에 불과하다. 이 관점이 옳다면 맹장은 왜 있는가. 전나무는 왜 꽃가루를 낭비하는가. 인간은 왜 이타주의적 행동을 하는가. 다윈 역시 난관에 빠졌다. “모든 것이 적응이라면, 상황은 더 좋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자연선택의 전능함에 기대던 다윈은 차츰 자연선택 이외의 작용에 대해서도 탐구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다윈은 ‘다중 원인론자’라는 것이다.

다윈주의가 ‘진보’ 개념을 전제하는지도 오랜 논쟁거리였다. 사실 어떤 진화론자들은 ‘진보’라는 단어를 입에도 올리기 싫어한다. 자칫하면 다윈 이전의 세계관인 (신의 섭리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론으로 회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니면 다윈 이후의 역사가 오용한 진보 개념의 끔찍함 때문일 수도 있다. ‘진보’라는 깃발로 ‘미개’한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운 뒤 닦달한 것이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 아니던가. 진보를 믿지 않는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출현이 ‘우연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자크 모노는 “우주는 생명을 임신하지도 않았고, 인간을 포함한 생명계도 임신하지 않았다. … 이 우주에서 인간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노의 말은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그저 ‘낭만적’인 결론이라는 주장이 즉각 나왔다. 크리스티안 드 뷔브는 “같은 조건만 주어진다면, 생명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게 생겨날 것”이라고, 조지 월드는 “우주는 불가피하게 생명을 낳는다”고 반박했다. 그래서 커닝햄은 타협책을 제시한다. “진화에 진보패턴이 나타난다. 하지만 진화가 보여주는 것이 역사의 진보는 아니다. 진화하는 것은 구조, 법칙, 형태다.”

사실 과학과 종교는 요란하게 싸울 일이 없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직후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와 진화론자인 올더스 헉슬리가 벌인 논쟁은 ‘기념비적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마케팅적으로 과장됐다는 것이 커닝햄의 지적이다. 윌버포스 주교의 편에도 과학자가 많았고, 헉슬리 역시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과학자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일부러 논쟁을 벌였다. 즉 과학과 종교의 전쟁은 ‘가짜’였다.

대중은 그렇게 믿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다윈은 종교에 의해 탄압받은 과학자라고. 그러나 커닝햄은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도 지구가 구형임을 전제했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종교 지도자에 의해 박해받기는커녕 자신의 책이 출판된 해에 자연사했고,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 역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안도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알려진 것과 달리 유연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 덕분에 종교는 잘못과 미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종교 덕분에 과학은 우상숭배와 거짓 절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성직자 오브리 무어는 “다윈주의는 특별 창조론보다 훨씬 기독교다웠다. 다윈주의는 하나님이 자연에 내재하며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고 암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물리적 기원에 대한 설명은 과학이,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설명은 종교가 각각 나누어 맡자는 것이 이들의 생각인 것처럼 보인다.

커닝햄은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 교리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을 전개한다. 아니 커닝햄은 자신의 해석이 이치에 맞는 것이어서, 오히려 현대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해석이 나쁜 의미에서 ‘중세스럽다’고 여긴다. 에덴동산이 과거 어딘가에 있었다는 믿음, 하나님이 6일 만에 천지를 만들었다는 해석, 인간의 원죄의식, 내세에 대한 약속을 모두 부정한다. 대신 물질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초월주의를 간직하는 길을 내려고 애쓴다.

성 이레나이우스는 말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약속이 이뤄지는 미래로 나간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창조는 끝나지 않았고 계속되고 있다. “창조는 하나님의 뜻이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성서는 홀로 떨어진 과거사가 아니라, 펼쳐진 미래에 대한 책이다.

핵심은 그리스도다. 기독교가 물질을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다. “그리스도는 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스도는 몸을 창조하고, 몸을 취하고, 몸을 구원하고, 끝으로 몸을 부활시키기 때문이다. 이 부활보다 더 육적인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해 자연/은총, 성스러움/세속, 자연/초자연의 이원론은 무너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죽음 너머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최악이다. 그것은 “이 세계를 죽음의 손아귀에 넘기고 저 세상을 꿈꾸라고” 유혹하는 격이다. 세상은 ‘우주적 공동묘지’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이 이르듯이 “우리가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다.”(21:2)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를 두고 “억압된 피조물의 한숨”이며 “비정한 세계의 마음”이며 “삭막한 환경의 영혼”이며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다. 커닝햄은 허무주의야말로 그렇다고 되받는다. 가차 없는 물질주의로 아름다움, 진리, 선, 인격의 근거를 허문 데 따른 이득은 무엇인가. 인류의 오랜 유산인 종교를 파괴하고 광막한 허무주의의 사막에 도착해서 무엇을 얻었는가. 과학과 종교는 함께할 수 있다고 커닝햄은 믿는다. 다만, 둘의 싸움을 붙여 이득을 보려는 사람만 멀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생전 종교인의 거센 비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 찰스 다윈은 죽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됐다. 낯설 것 없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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