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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日우익의 ‘근·현대사 왜곡’ 뿌리
정리=도쿄 | 조홍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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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다모가미 도시오 자위대 항공막료장이 돌연 해고됐다. 몇달 전 그는 기자회견에서 나고야 고등법원이 이라크 내에서의 자위대 활동에 대해 위법이라고 한 것을 비난했다. 매파적인 견해로 널리 알려진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몇개의 선을 넘어버렸다.

그는 부동산회사인 APA그룹이 주최한 ‘진정한 근·현대사관’이란 현상논문전에 응모, 최우수상을 수상해 파문을 일으켰다. APA그룹의 모토야 도시오 사장은 이시가와현 고마쓰 공군기지를 후원하는 정치단체의 핵심인물이다. 그는 아베 신조 전 총리, 다모가미를 포함한 우익 정치인들과 친하다. 항공자위대 고위층은 다모가미의 논문이나 항공자위관들이 제출한 94건의 논문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악명 높은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와타나베 쇼이치 교수가 논문수상위원회를 이끌었다. 논문들은 하나같이 자기들 말대로 ‘독립국가로서 바른 역사 이해를 위해 나아가는 일본’을 지향하고 있다.

다모가미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인도적이고 합법적이며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침략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후 문민 통치자들의 공식 견해에 반하는 것이다. 그는 헌법뿐 아니라 일본 정부가 2차대전 기간 중 침략한 국가들에 대해 사과한 공식 입장에도 반대하고 있다. 이는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판단에도 배치된다.

일본의 주요 야당들과 함께 한국과 중국 정부도 다모가미의 견해를 비난했다. 아소 다로 총리의 역사와 헌법에 대한 관점 역시 다모가미의 시각과 비슷하다. 총리로서 다모가미를 해고했지만 그의 역사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피했다.

다모가미는 헌법의 굴레로부터 일본 군대를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의도에서 자위관들에게 현상논문전에 응모하도록 권유했는지도 모른다. 이 자위관들을 보면 흡사 일본의 재무장과 팽창을 외치던 1930년대 ‘쇼와시대 복고’라는 아이디어를 개척한 젊은 장교들의 후계자란 느낌이 든다. 차이점이라면 지금 장교들은 ‘문민통치’하에 있다는 점이다. 주목할 점은 방위성의 문민관료들이 다모가미와 그 추종자 징계에 주저한다는 것이다. 다모가미는 논문 마지막 부분에서 자위대에 부과된 이런저런 한계를 언급하면서 헌법 개정을 해서라도 동맹국이 공격을 받았을 때 반격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모가미에게 역사적 진실 여부는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는 사실을 왜곡하고, 편한 대로 증거를 선별해 이용하고 있다. 30년대와 40년대 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아시아인과 일본의 민간인, 병사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있다. 진실이 아니더라도 장래 정치투쟁에 뛰어들 실천주의적 장교들에게 (자기 방식대로) ‘올바른’ 역사적 관점을 고양시키는 것이 그가 노리는 바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반세기 이상 고위관료와 군 장교들은 끊임없이 (망언을 해대며) 국내외의 논쟁을 유도해왔다. 그들은 전쟁 책임에 대해 다른 말을 하거나 다모가미처럼 민족주의적 견해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왔다. 한마디로 이런 사건들은 그들의 지적 수준을 반영한다.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내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중국과 한국 등 주변국들의 불신을 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모가미의 관점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 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에 대한 그의 무지와 41년 11월 작성된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의 ‘노트’와 같은 문서에 대한 오역은 일단 제외하자. 일본이 이웃국가들을 식민지화하고 침략하는 과정에서 범한 수많은 부당한 범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2차대전 후 전쟁범죄에 대한 법체계와 전범자에 대한 처벌을 주도한 것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도쿄국제군사재판에서 소수의 일본 지도자들만 기소됐고, 그것도 일부에 대해서만 전범죄가 인정됐다. 대신 유럽과 미국, 일본의 식민정책은 단죄에서 제외됐다. 일본 내 64개 도시에 대한 폭격,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 같은 미국의 야만적인 공격 등 승전국의 전쟁범죄는 단죄되지 않았다. 도쿄군사재판 기간 중 미국과 일본인 변호사들이 이를 이슈로 제기하려던 시도들은 모두 거부됐다.

특히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가 식민지 주민들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눌러 식민제국들을 되찾는 것을 도왔다. 그런데도 이들 국가는 문명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 침략정책을 추구한 일본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았다.

일본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서방국가들의 위선을 용서할 수도 없고, 또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현대 일본의 모든 궤적은 도쿄재판에서부터 왜곡됐다고 생각한다. 또 도쿄재판에서 일본 측 피고인들이 공정한 심문을 받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 52년 일본이 공식적으로 독립하자 일본 내부에서 도쿄재판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일부 일본인들은 재판의 긍정적인 측면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잘못된 부분만 지적했다. 그들은 도쿄재판에서 소수의견을 낸 인도 출신 라다비노드 팔 판사를 칭송하며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팔 판사는 일본군 지지자였다. 그는 전시 일본 수뇌부를 단죄하는 대신 그들의 무죄 방면을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 아시아의 진정한 적은 서구열강이었다. 이후 도쿄군사재판의 평결은 일본 우익들의 사상에 고정관념을 심어주게 됐다.

전승국이 일제의 전범을 기소했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실책을 범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나는 식민주의 정책에 대한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히로히토 일왕을 기소하지 않은 것이다. 히로히토는 전쟁 기간 중 일어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의 신하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했지만 히로히토는 법적·도덕적으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20세기 초 일본 역사에 대해 우익 관점을 갖고 있거나 일본의 식민통치를 옹호한 것은 다모가미 혼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 그 같은 사상을 가르치고 또 언론인이나 작가, 여론주도층을 통해 확대재생산하려면 많은 지지자들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아직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상태다.

그럼에도 전쟁의 기억에 대한 유권자의 여론은 갈린다. 아소 총리를 포함해 집권 자민당의 많은 정치인들은 일부 언론의 기자들처럼 다모가미의 얕은 민족주의적 감정에 공감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도쿄군사재판 평결에 대한 거부라든가 헌법에 반하는 집단적 자위권 인정을 요구하는 따위의 논란 소지가 많은 논점들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리고 있다.

그러나 10년 뒤 다모가미와 같은 역사적 인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일본 정부의 엘리트와 그 참모들 사이에서 활개치게 될 경우를 상정해보자. 일본이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나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정책에 최종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기까지 30년 이상 발전돼온 것에 비견되는 극단적인 외교정책을 펴는 정권이 될지도 모르지 않은가.

다모가미는 미·일 안보조약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일본의 관여도가 약화되고 있는 데 대해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가 ‘부모’라고 칭하는 군사강대국 미국과 ‘그 아이’인 일본과의 사이의 유사점을 끌어내고 있다. 자위대 장교들은 문민 통제에서 벗어나 민간 관료가 직원으로 있는 방위성의 작전정책국을 폐지, 제복을 입은 현역 장교들이 자위대를 움직이는 체제 위에서 이 같은 ‘부모와 자식’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미·일 안보조약이 일본 정치제도의 동맥에 주사되는 독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일본 스스로 진정한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킨다. 2차대전과 냉전의 잔해가 남아 있는 한 일본은 전범을 제대로 다루고, 미국 중심에서 벗어나 전방위 외교정책을 펴는 평화국가로 남기 어렵다. 미 국방부도 헌법상 제약을 원상복귀시키고 (전쟁을 치르는) ‘보통’ 나라가 되기 위해 공격무기체계를 도입하는 일본을 진정 환영할 것 같지는 않다.


허버트 빅스는 누구

허버트 빅스(70)는 미국의 저명한 일본 역사학자다. 하버드대에서 역사와 극동언어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일 양국에서 현대사를 가르쳤으며 2001년엔 저서 <쇼와덴노(昭和天皇)-근대 일본의 형성>으로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그는 이 저작에서 “히로히토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깊숙이 연루됐고 패전 후에는 미국의 묵인 아래 전범재판을 피했다”고 결론지었다. <1590~1884 일본의 농민항쟁>(1986) 등의 저서가 있다.

<허버트 빅스| 美 빙엄턴대 교수·역사학>


On October 31, 2008, General Tamogami Toshio, Japan’s Air Self-Defense Force [ASDF] Chief of Staff was abruptly dismissed from his post in the Defense Ministry, but allowed to retire with his full pension rather than be summarily fired. At a press conference several months earlier, Tamogami, who had also been the superintendent of the SDF Joint Staff College, publicly expressed contempt for a ruling by the Nagoya High Court that the Japanese military mission in Iraq was unconstitutional. On this occasion, the outspoken General, widely known among his peers for provocatively hawkish views, crossed several more lines.

He entered and won the top prize of 3 million yen ($30,000) in an essay contest sponsored by a large scandal-marred construction and real estate conglomerate, the APA Group, which required contestants to write on “The True Outlook for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APA‘s President is Motoya Toshio, the author of historical works and a key figure in political organizations supporting the Komatsu Air Base in Ishikawa Prefecture (fronting the Sea of Japan). He has strong ties to former Prime Minister Abe Shinzo and other rightist politicians, including Tamogami. As far as is known, superiors in the Defense Ministry’s chain of command did not carefully scrutinize Tamogami’s essay or any of the 94 essays submitted by ASDF soldiers. A notorious Nanjing atrocity denier, Professor Watanabe Shoichi, headed the panel of judges that awarded the prize. And the essays were apparently “solicited for the purpose of ‘steering Japan toward a correct understanding of history as an independent nation.’”
 
The APA contest website promoting a book on Japan’s modern history by its President Motoya Toshio written under the pen name Fuji Seiji

The views the General expressed did more than simply contravene the official positions of his civilian supervisors. By arguing that Japanese colonial rule was humane and legal, and that Japan was not an aggressor in World War II, Tamogami contradicted the constitution and the official government stance of apology to the nation’s that Japan had invaded before and during World War II. At the same time, he placed himself at odds with the political sense of most educated Japanese people.

The governments of China and South Korea immediately condemned Tamogami’s views, as did Japan’s leading parliamentary opposition parties, who hoped to use the affair to topple the country’s new LDP Prime Minister, Aso Taro. Aso’s own controversial nationalist ideas on history and the constitution are similar to Tamogami’s, but as prime minister he fired the general and refrained from discussing his ideas. An unrepentant Tamogami, however, held his ground and reiterated that the Japanese “people had been misled by erroneous education” into thinking that their country once had a dark past.

In his desire to free the Japanese military from constitutional restraints, Tamogami might have encouraged many senior and junior active-duty ASDF officers to join him in entering essays (of unknown content) in the same competition: the number varies from over 50 to as many as 95. The impression conveyed is that these ASDF officers are heir to the “young officers” of an earlier era who exploited ideas of a “Showa restoration” in an effort to accelerate Japanese rearmament and expansion in the 1930s. The difference is that the uniformed officers of today are supposed to be under “civilian (bureaucratic and parliamentary) control,” not in spiritual rebellion against the nation’s peace constitution. It is notable, however, that the civilian bureaucrats in the Defense Ministry, six of whom have also had their knuckles lightly rapped, initially hesitated to discipline Tamogami and his followers.

Tamogami places a wreath on a US war memorial on August 8, 2008

Writing on the theme, “Was Japan an Aggressor Nation?”, Tamogami argued the following:

* Japanese colonial and semi-colonial rule, based on legal treaties, was “very moderate” in nature and beneficial to Koreans, Taiwanese, and Chinese alike. To defend these legally-recognized positions Japan waged justifiable wars.

Manchukuo: The (Japanese) military and the people cooperate for prosperity

* It was the Comintern, according to Soviet intelligence sources, and not the Kwantung Army that might have engineered the assassination of the Chinese warlord Zhang Zuolin in 1928, which set the stage for Japan to take over all of Manchuria.

*Japan never waged an illegal war of aggression in China starting in 1931, or elsewhere in the European and American colonies in Southeast Asia and the Pacific a decade later.

* Manchukuo, unlike the Western colonies where racism was the basis of rule, really was a bastion of racial tolerance; so too was imperial Japan.

* The Comintern an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played an evil role in the Japan-China War, manipulating Chiang Kai-shek to attack Japan.

*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 “very carefully” entrapped Japan into attacking Pearl Harbor after Comintern spies, such as Harry Dexter White in the Treasury Department, wrote the “Hull Note” that helped “manipulate President Roosevelt and draw [Japan] into a war with the United States.”

* “Had Japan “not fought the Greater East Asia War at that time,” it could not “have experienced the world of racial equality that we have today.” Indeed, without the War of Greater East Asia, Japan might have become “a white nation’s colony.”

In sum, Tamogami concluded, “what this country has done is wonderful.” Toward the end of his essay, citing many limitations on Japan’s Self-Defense Forces, he stresses that it should be allowed to exercise the right of collective self-defense?the implication being that it could then assist allies under attack, something that would obviously necessitate constitutional revision.

Clearly, true and false are not issues for Tamogami; belief in a “normal” (war-waging) state and more voice for the professional officer class are. The General tampers with facts; he uses evidence selectively; he cherry-picks international law when it suits his purpose; and he omits any mention of figures on Asian or Japanese civilian and military deaths from the wars of the 1930s and early ‘40s. His aim is to forge a body of activist officers who will participate in political combat, promoting the “true” perspective on history, even if it is not factually true for the particular historical period he cares about.

But none of his assertions are in any way new.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high ranking civilian and military officials have repeatedly made statements that provoked domestic and international controversy--either for speaking with a forked tongue on issues of war responsibility, or for reiterating, often unconsciously, crudely nationalistic sentiments of the type that Tamogami expressed. Such incidents reflect badly on the intellectual quality of the officials involved. They touch off storms of political debate within Japan and breed distrust of Japan in China, Korea, and other nations that experienced Japanese occupation. But they also serve to heighten popular vigilance against the danger of domestic militarism. Regrettably, comparable effects are seldom produced by policies initiated by Japan’s security alliance partner, the United States, whose endless war crusades and entrenched militarism have distorted national life and undermined international order.

What then are we to make of Tamogami’s views? Put aside his ignorance of history, international law, the 1951 San Francisco Peace Treaty, and his misinterpretation of sources and documents such as Sec. of State Cordell Hull’s memorandum of November 26, 1941. Is Tamogami motivated by a sense of wounded self-esteem and wrong inflicted by the US and its allies on Japan after its military and ideological defeat in 1945? Is this the reason why he is unable to recognize the many unjust acts and countless crimes committed by Japan in the course of its colonialism and invasion of neighboring states? Consider, for a moment, questions of hypocrisy and double standards in assessing the actions of Japan, the United States, and other nations that went to war throughout the twentieth century.

In 1945, the US and the Soviet Union took the lead in establishing the legal nomenclature of war crimes and the principles for adjudicating them and punishing offenders. At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IMT) at Tokyo (1946-8), a small number of Japanese leaders were prosecuted and punished for the crime of aggression and for war crimes in the narrow sense. But the problem of European, American, and Japanese colonialism was ignored. And the war crimes of the Allies, which culminated in the American terrorist bombing of sixty-four Japanese cities and the nuclear destruction of Hiroshima and Nagasaki, were also never adjudicated. During the IMT, attempts by American and Japanese defense attorneys to raise these issues were rejected out of hand.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Judges left, defendants right, prosecutors rear

Moreover, the United States helped Britain, France, and The Netherlands to restore their respective colonial empires by waging war to destroy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s of their former colonial subjects. While these colonial powers were professing to be defenders of civilization, sitting in judgment of Japan for pursuing policies of aggression, they themselves were continuing to commit comparable offenses.

Some Japanese conservatives can neither forgive nor forget this Western hypocrisy. For them, all distorted (i.e. “official” or “victor propaganda”) versions of Japan’s modern past trace back to the Tokyo trial. They also believe the Japanese defendants at Tokyo were denied a fair hearing. When the occupation ended in 1952 and Japan regained its formal independence, a tiny minority rejected the Tokyo trial because they could see only its negative, not its many positive sides. They began to commemorate and idealize one of the three dissenting judges on the tribunal, Radhabinod Pal. The Indian nationalist judge had been a partisan sympathizer of the Japanese military. He rejected the charge of aggression against Japan’s wartime leaders and sought their acquittal on all counts. For Pal, the real enemy in Asia was the Western White Man. Ever since that time the castigation of the Tokyo IMT’s findings has been a fixed element in Japanese right-wing thought. This is not to deny that in prosecuting Japanese war criminals the victor nations erred in key respects. One was the issue of colonialism; another was the failure to indict Emperor Hirohito, who, alone among Japan’s leaders, was at the center of events during the whole war-period. Yet Hirohito was never even questioned or made to bear moral responsibility for the war, though several of his most loyal subjects were executed or imprisoned on his account.

Tamogami is not alone in defending Japanese colonial rule and holding other far-right views of early 20th century Japanese history. But for such ideas to dominate, they must be taught in the nation’s schools and universities, widely disseminated among a majority of voters by Japanese journalists, writers, and other opinion-makers, and overcome a political-culture supportive of the peace constitution. In today’s Japan none of these conditions yet obtain. Editorial comment in the wake of Tamogami’s dismissal from office suggests that truthful views of Japan’s wars of aggression from 1931 to ’45 are widely recognized. Mainstream Japanese political culture rejects the fringe ideas associated with Yasukuni Shrine and its history Museum, and articulated here by the General.

Nevertheless, the voting public remains divided on issues of war remembrance. Many politicians in the ruling Liberal-Democratic Party, including Prime Minister Aso, share Tamogami’s shallow nationalistic sentiments, as do writers for Fuji Sankei and its affiliated media outlets. Most of these people, however, refrain from publicly expressing their sentiments on highly contentious issues such as implicitly rejecting the verdicts of the Tokyo trial or calling for Japan to exercise the right to collective self-defense in violation of its Constitution.

War veterans parade at Yasukuni shrine

Suppose, however, in the coming decade, powerfully situated individuals with historical consciousness similar to Tamogami’s came to prevail among Japan’s governing elites and their advisers. Could Japan experience the reign of extremist foreign policy ideas comparable to those of the American neo-conservatives and neo-liberals whose ideas developed over a span of three decades before reaching their ultimate expression in the policies of the George W. Bush presidency? Could something similar happen in Japan?

Tamogami says he is uninterested in weakening Japan’s commitment to the US-Japan Security Treaty [AMPO], or Japan’s ties to other Asian countries. He draws an analogy between America, the militaristic superpower that he calls the “parent,” and Japan, its “child.” Japanese staff officers who conform to his way of thinking imagine they can put this “parent-child” relationship on a more equitable basis by jettisoning civilian control, eliminating the Defense Ministry’s “Operational Policy Bureau,” staffed by civilian bureaucrats, and allowing “mostly uniformed officers” to “manage SDF units under the defense minister.”

But the real problem with the US-Japan security relationship is that it is a poison injected into the arteries of Japan’s political system, continually weakening Japan’s commitment to its constitutional ideals. As long as this relic of World War II and the Cold War remains, Japan will have difficulty remaining a peace state, dealing with the criminality of its lost war, and developing an omni-directional rather than US-centered foreign policy. To defend Article 9 of the peace constitution without, at the same time, confronting AMPO is to do the work of Tamogami and people who think like him.

One final consideration: it is most unlikely that Pentagon officials would really welcome a Japan that undid constitutional restraints on the growth of its militarism, and acquired offensive weapons systems in order to become a “normal” (war-waging) state. Conversely, it isn’t clear what Japan’s leaders would do if, in the near term, the “parent” escalated its failed colonial-wars in Iraq and Afghanistan and pressured Japan to involve itself more deeply in them. Social Democratic Party leader Fukushima Mizuho understood the problem correctly, however, when she linked the SDF’s expanding role in support of America’s wars to the spread of beliefs “within the Defense Ministry that Japan’s wartime acts did not constitute ag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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