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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번 매코맥 칼럼](12)과거와의 대면

모든 국가는 어두운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 비밀과 대면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그러나 과거의 실수와 악행을 반복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비밀을 마주하고, 책임을 인식하며, 사죄와 보상을 시도하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이에 대한 기록은 혼재돼 있다.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36년의 식민통치에 대해 사과하고 유감을 밝힌 것은 일제가 패망하고 반세기가 흐른 1995년의 일이었다. 몇 년 후 군위안부 문제까지 포함하는 비슷한 사죄가 있었고, 98년엔 오부치 총리가 그 사죄를 한국에 직접 표명했다.

일본의 사죄는 식민주의와 전쟁의 책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죄는 일본 보수주의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사죄 표명에 반대하는 입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일본은 사과할 것이 없었다. 일본은 ‘순수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강조하고 이 역사를 교과서에 적절히 반영해야 했다. 아베 총리의 표현에 따르자면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다. 무라야마 담화를 거부하고 그것을 대체할 명안을 찾기 위해 전시 일본을 회고하는 정치 그룹들, 즉 ‘일본의 미래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소장의원 모임’ 같은 의원 모임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신토정치연맹의 영향력 역시 커졌다.

과거의 잘못 옹호한 다모가미

이 같은 맥락에서 일본 자위대 항공막료장인 다모가미 도시오는 지난 10월 ‘독립국가 일본의 정확한 역사 이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민간 공모전에 제출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주의와 전쟁을 옹호하고, 일본이 과거를 잘못 이해해 민족적 자존심을 상실했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논문은 논란을 일으켰고 정부는 그에게 조기 사퇴를 요구했다.

고이즈미 정부에서 자위대 고위직으로 임명됐고 이후 3명의 다른 총리 밑에서 승진했던 다모가미는 그의 관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를 임명하고 승진시켰던 정부는 그의 관점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모가미에 따르면 20세기 일본은 국제법과 조약에 따라 식민지 대만과 한국을 훌륭하게 발전시켰고 그들을 평화적으로 통치했다. 일본은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자들의 도발도 막아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저항의 테러를 일으켰고 일본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속여 전면전으로 끌어들였다. 다모가미는 불필요하고 그릇된 수치심은 제쳐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일본의 영예로운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다모가미의 부하 94명이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해 유사한 분위기의 논문을 썼다. 다모가미의 지휘 아래 훈련받은 젊은 장교들은 다모가미 혹은 그가 초빙한 강사들한테서 도쿄재판(1946~48)의 부당함과 미 점령군의 추방이 불러온 참담한 결과 등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들었다.

11월11일 참의원 외교방위위원회에 출석한 다모가미는 한걸음 더 나아가 개헌과 95년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11월15일 산케이신문은 ‘이웃 국가들엔 모욕적일 수 있으나 식민통치와 전쟁에 관한 무라야마의 사죄를 철회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다모가미의 입장을 지지했다.

다모가미의 의회 발언 이후 실시된 여론 조사는 상당한 수, 아마도 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원칙에 따른 용감한 태도 때문에 희생양이 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명 언론인 다하라 소이치로는 다모가미가 주도한 집단 행동에 대해 현역 고위 군인이 국가와 헌법에 대항해 반역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그에게 다모가미의 언행은 파시즘과 전쟁으로 이어졌던 1930년대의 반항과 반역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만약 그가 옳다면 다모가미 문제는 지난날과 같은, 혹은 그보다 더한 어떤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징후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다모가미와 그 부류들이 주장하는 메시지의 강렬함은 그들에게 붙은 보수주의라는 간판이 ‘민족주의자’나 ‘일본 제일주의’와 같지 않다는 사실 탓에 더욱 날카로워진다. 이 ‘보수주의’는 ‘미국제일주의’의 변형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2001년 이후 부시 행정부가 미·일 관계를 ‘성숙한’ 동맹으로 발전시키자는 과업을 일본에 부여하면서, 일본의 군사 및 민간 지도자들은 미군 지휘체계에 일본군을 더욱 강력하게 종속·통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자위대를 인도양과 이라크에 파견했고, 자위대가 ‘집단 안보’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했으며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준비 조치를 취했다. 다모가미는 ‘보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자국 정부가 미국의 지역적·국제적 목표에 일본을 종속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모가미 사건이 노출시킨 것은 미·일 동맹의 불평등한 본질이 일본의 민족 심리에 초래한 엄청난 긴장이다. 일본이 이전 정부들이 유지했던 제한적 자치 상태에서 고이즈미, 아베, 후쿠다, 아소 총리 정권을 거치며 완전한 ‘피후견 국가’의 종속 상태로 추락했다는 것도 보여줬다. 천황 중심의 민족주의가 붕괴하고 60여년이 흘러 일본은 정교하지만 취약한, 의존적 민족주의의 모델을 수립했다. 이것을 필자는 ‘피후견 국가’라고 불러왔다. 점점 더 많은 일본 지도자들이 미국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많은 불만과 희생자 의식을 경험하고 있다. 일본의 종속이 심화하자 아베 신조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환상 속으로 도피했고, 다모가미는 그의 상실된 조국에 대해 한탄했다. 양자는 기능적으로 모두 보상의 메커니즘이다. 한편에서 일본 정치인과 관료들이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잃어버린 영혼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대면한 ‘진실화해위’

‘미국 제일주의’는 물론 한국에서도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대체로 분노의 기조가 없고 일본식 담론보다 수준이 높다는 특징이 있다. 게다가 2005년 특별법에 따라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다모가미라면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국가의 비밀을 정밀하게 파헤치기 위해 대규모 조사를 벌여왔다. 그들은 이전 정권에서 무수한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주장도 증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우리는 진실위원회의 국제적 역할 모델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수치스러운 과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유일한 국가”라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를 통해 한국인들은 정말로 그들의 역사와 역동적이고도 진지하게 대면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적 기획의 범위는 공식적으로 한국의 국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도 한국은 미국이 주도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국가들 중에서 비록 모호하긴 했지만, 베트남인들에게 사죄한(2001년 김대중의 발언) 유일한 국가다.

이런 노력은 아직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아시아에서 한국은 다른 모든 국가들에 ‘만약 민주주의가 진보하고 있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촉구하는 등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일은 바로 그들의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개번 매코맥|호주국립대 명예교수> <정리 최희진기자>

(12) Facing the Past
 
 All states have dark secrets, and none finds it easy to confront them. Yet the best assurance that past mistakes and misdeeds will not be repeated is that they be faced, responsibility recognized, and apology and compensation attempted
 
 In Northeast Asia the record on this score is mixed. It was 1995, a half century after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before Japanese Prime Minister Murayama Tomiichi expressed Japan's regret and apology for the pain and harm done by the four decades of colonialism. A few years later, a similar apology was extended to cover the Comfort Women and in 1998 that apology was explicitly directed to South Korea (by Prime Minister Obuchi).
 
 However, the apologies, supposed to resolve the issue of responsibility for colonialism and war once and for all, instead stirred fierce conservative outrage in Japan, and over time the opposite view gained ground: Japan had nothing to apologize for and should instead insist on its "pure" and "proud" history and on history texts that would appropriately reflect it. Japan was, in Prime Minister Abe's words, a "beautiful country." As political groups that rejected the Murayama apology and instead looked back to wartime Japan for inspiration replaced Maruyama and his colleagues in government, the Dietmembers' Associations "for the Passing on of a Correct History," for a "Bright Japan", and for "Reflection on Japan's Future and History Education," gained influence, as did the Shinto Politics League.
 
 In this context, the head of Japan's Air Self Defense Forces, General Tamogami Toshio, in October 2008 submitted an essay in a competition on the theme of "Steering Japan towards a Correct Understanding of History as an Independent Nation." He defended Japan's colonialism and war and lamented the loss of national pride due to the adoption of a false understanding of the past. His essay was awarded the $30,000 prize, but it stirred such furor that the government had to demand his early retirement.
 
 Tamogami, appointed to senior SDF post under Koizumi and retained or elevated under the three Prime Ministers who succeeded him, had made no secret of his views, so that it may be presumed that the governments that appointed and promoted him found nothing offensive in them. According to Tamogami, 20th century Japan had been responsible for praise-worthy colonial development in Taiwan and Korea in accord with international law and treaties, and had ruled them peacefully and to good economic and social effect, while resisting terrorism and communist provocation. In China, communists had launched a terrorist campaign of resistance, leaving Japan no alternative but to use force to try to put them down. President Roosevelt tricked Japan into full-scale war. False and unnecessary shame should be set aside, Tamogami argued, concluding that "we must take back the glorious history of Japan." Ninety-four of Tamogami's subordinates wrote essays for the competition in similar vein.
 
 Young officers being trained at the Joint Staff College under his direction were treated to lectures by Tamogami (or his guest lecturers, most of whom were members of the "Tsukurukai" or Association for New Textbooks in History) on subjects such as the injustice of the Tokyo tribunal (1946-48) and the disastrous effects of the US occupation's purges (that allowed "anti-Japanese" leftists to seize far too much power in the country, especially in the universities).
 
 Weeks later, on 11 November, Tamogami went further, telling a House of Councilors sub-committee that he also favored explicit revision of the constitution and of the 1995 Murayama apology. One major newspaper (Sankei shimbun, 15 November) explicitly endorsed that stance, calling for the Murayama apology over colonialism and war to be withdrawn, even though such an act would be seen by neighboring countries as a slap in the face. Tamogami told that same paper later in the month (27 November) that the Maruyama statement was "strongly disagreeable" and was being used as "a tool to suppress free speech."
 
 Opinion surveys in the aftermath of Tamogami's unrepentant Diet appearance suggest that his stance enjoyed considerable, perhaps majority support. For some, at least, he came to be seen as a man victimized for a courageous stand on principle. Yet the critic, Tahara Soichiro, commented that the collective action led by Tamogami amounted to organized rebellion on the part of serving senior military staff against the state and constitution, in effect an uprising (kekki), albeit at the level of words. For him it called to mind 1930s acts of insubordination and eventually rebellion that opened the way to fascism and war. If he is right, the Tamogami affair should be viewed with foreboding, a sign of things to come, as much as, or more than, of things past.
 
 The shrillness of the message of Tamogami and other diehards is sharpened by the fact that their brand of so-called conservatism is actually not "nationalist" or "Japan-first"-ism at all. This "conservatism" is better seen as a variant of "USA-first"-ism." Especially since 2001, assigned by the Bush administration the task of turning the US-Japan relationship into a "mature" alliance, Japanese civil and military leaders have done their best to reinforce Japanese military subordination and integration under US command, sending Japanese forces to the Indian Ocean and Iraq, endorsing a much tighter integration of Japan's Defense Forces under US command, removing barriers to their active service on "collective security" missions, and taking preliminary steps towards revising the constitution (as counseled by US government officials). Tamogami had no criticism of the steps taken by "conservative" and "nationalist" governments to deepen Japan's subjection to US regional and global purpose.
 
 What the Tamogami affair therefore exposed was the immense strain caused to the national psyche by the unequal nature of the alliance, and its gradual descent from limited autonomy under previous governments into full "Client State" subordination under Koizumi, Abe, Fukuda, and Aso. Six decades after the collapse of emperor-centered nationalism, Japan has constructed an elaborate but fragile model of dependent (or zokkoku) nationalism, that I have called a "Client State." The more leaders in Japan struggle to meet US demands, the more they experience a sense of grievance and victim consciousness. As Japan's subordination deepens, Abe Shinzo takes refuge in the fantasies of "beautiful country" and Tamogami laments his lost country, both being functionally necessary mechanisms of compensation. On the one hand Japanese politicians and bureaucrats deepen their dependence on the US, on the other, they lament their lost soul.
 
 "America-first"-ism" is of course well-known in South Korea too, but on the whole without the tone of resentment that marks much high-level Japanese discourse. Furthermore, the Korean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established under a special law in 2005, has been engaged on a massive enterprise designed to explore precisely the sort of skeletons in the national cupboard that Tamogami in Japan refuses to acknowledge, documenting the claims of the countless victims of former regimes. It makes the claim "we will strive to be an international role model as a truth commission. Korea is the only country in Asia that reveals its shameful past to the public." Through it Koreans do indeed actively and seriously confront their history. The scope of the national project for truth and reconciliation has yet to be formally extended beyond Korea's borders, but Korea is also the only former member of the US-led coalition that fought in Vietnam to have made steps, however tentative, to apologize for the "pain" (Kim Dae Jung's word in 2001), caused to the Vietnamese people. It may be far from perfect, but Korea nevertheless constitutes a beacon of light in Asia calling all countries to do what they must do if democracy is to advance: honestly face their past.
 

입력 : 2008-12-08 18:18:31수정 : 2008-12-08 18: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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